내 직업은 농촌기획자, 농부들 돈 벌게 돕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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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바꾸는 사람들] 농촌과 도시 연결하는 농사펀드 박종범 대표

[이창한 기자]

"빚 없이 농사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판매 걱정 없이 내 철학대로 농사지어보고 싶다."

 
박종범 대표는 이런 농부들의 고민을 도시민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2014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농사펀드'를 창업했다. 자본금 1천만 원과 임팩트 투자사 소풍(sopoong)에서 시드 투자를 받은 금액으로 출발했다. 사업 초기 '사회적기업가육성사업'(사회적기업진흥원)과 'H-온드림 펠로우'(현대자동차그룹) 등에 선정되어 사업화 자금을 안정적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농사펀드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농부들에게 선투자하는 모델이다. 농부는 안정적인 생산 여건을 제공받고, 소비자는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정한 가격으로 공급받는 '공동생산자' 관계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가 창업을 결심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후 농촌 관련 일을 했던 전 직장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작은 규모지만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농사짓는 농부들, 돈 되는 농사보다 사람과 환경에 이로운 농사를 짓는 농부들을 만나게 되면서다. 그동안 자신이 농촌을 대상화했다는 반성을 하면서 농부들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자신을 '농촌기획자'라고 소개하는 사람 
 
▲ 농사펀드 박종범 대표 인터뷰에 응하는 박종범 대표. 손에 들고 있는 그림 카드는 농사펀드와 (주)88후드라는 작가 집단과 공동으로 만든 그림달력 굿즈
ⓒ 이창한

 
2018년 지역재단의 리더상을 수상한 박종범 대표는 자신을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는 '농촌기획자'라고 소개한다.

"농촌 분야는 '기획자'라는 일자리 분류가 없습니다. 농촌과 도시 중간쯤에 무언가 일을 하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저는 뭔가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 스스로 농촌기획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농촌이야말로 많은 기획자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박종범 대표는 주력 업무인 농사펀드 온라인 플랫폼 사업 이외에 농촌과 관련한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16년 4월부터 8개월 동안 '가업을 잇는 청년 농부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청년 농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청년 농부가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가업을 잇는 청년 농부 발굴 프로젝트는 케이크라우드(K-CROWD)와 농사펀드가 주최하고 네이버가 후원하는 프로젝트다. 자연 친화적인 농법과 가공법을 활용하고, 농법의 혁신, 토종을 지키려는 노력 등 농사의 의미와 새로운 방식까지 고민하는 청년 농부들을 발굴하여 지원하는 사업이다.

당시 전국 110명의 청년 농부가 지원하여 최종 12명의 청년 농부가 선정되었다. 이들 청년 농부들에게는 네이버 디자인팀과 함께 생산물과 가공품에 대한 브랜드 디자인 전반의 작업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농사펀드와 해피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판로를 지원하였다. 아쉽게도 후원사의 사정으로 프로젝트가 계속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이 프로젝트 이후 청년 농부에 대한 다양한 캠페인과 지원 사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뿌리밥상'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소비자들에게 먹을거리 뒤에 가려진 농업·농촌, 환경 등에 관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농가와 영농조합법인을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 컨설팅 및 디자인 지원 활동과 외부 협력사업 등도 추진했다. 외부 협력사업은 주로 농업·농촌 활성화와 연관된 사업들이다.
 
대표적인 외부 협력사업은 2017년 서울시 지역상생교류사업단(지역재단에서 2016년 5월부터 2018년 말까지 위탁운영)과 함께 진행한 '지역 상생 청년 에디터 육성사업'이다. 이 사업의 목적은 중소가족농이 생산한 농산물 판로를 지원하는 청년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서울시 뉴딜일자리 사업을 활용하여 10명의 청년을 선정하고 총 8강으로 구성된 교육을 이수하도록 했다. 그리고 판로 문제 해결이 필요한 농가를 발굴하여 자료조사와 취재를 한 후 온라인 홍보 콘텐츠를 제작하고 온·오프라인 홍보마케팅을 기획·진행하도록 했다(☞ 지역상생에디터 '서로이음').
 
이 사업을 통해 2017년 6월부터 2018년 말까지 총 30여 명의 농부(생산조직)와 이들이 생산한 농산물이 소개되어 판로를 지원받았다. 농부들은 생산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판로 확보를 통해 경제적인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또한, 평소에 농업·농촌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청년들은 농부들을 직접 만나 목소리를 듣고 농사에 대한 이들의 철학과 삶의 태도를 배우고 인식을 넓힐 수 있었다. 
 
▲ 농사펀드 농활사진 농사펀드는 정기적으로 농촌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 이창한

 
농사펀드는 올해 3월부터 충남 당진시와 6개월간 지역 상생 청년 에디터 육성사업 시범사업으로 '로컬에디터' 사업을 진행한다. 5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농사펀드는 농부를 취재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코칭을 담당하고, 당진시는 청년들이 지낼 공간과 프로그램 참여비 월 50만 원 중 일부를 지원(농식품부 시범사업비 중 30만 원, 농사펀드 10만 원, 당진시 순성면 올미마을 10만 원)한다.

청년들은 사업 기간 당진시에 살면서 한 달 중 10일은 에디터 업무를 하고, 5일은 지역교류와 교육, 나머지 6일은 자율활동(청년들이 희망하는 경우 지역 농가,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등을 연결하여 일을 제공)을 하며 지내게 된다. 이 사업은 운영이 쉽지 않고 여러 가지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지만, 지역에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서 뛰어든 사업이다.
 
농부 1명과 소비자 200명 이상이 관계 맺기 
 
▲ 박종범 대표와 농부와의 만남 박종범 대표가 농사펀드와 연계된 농부를 만나 인터뷰 하기 전 사진을 찍고 있다.
ⓒ 이창한

 
최근 농사펀드는 프로젝트를 줄이고 농사펀드 온라인 플랫폼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한정된 인원으로 많은 프로젝트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20년 농사펀드 매출 규모는 6억 원(농사펀드 매출 4억 원, 기업의 사회적 공헌 활동 기획사업 2억 원)으로 2017년 말 기준 8억 원(농사펀드 매출 5.8억 원, 용역사업 2.2억 원)보다 2억 원 정도 줄었다. 농사펀드의 수익모델은 농부가 생산한 농산물 가격의 10%를 수수료로 받는 구조이기 때문에 온라인 플랫폼 사업에 소홀할 경우 경영에 어려움이 발생한다.

현재 직원은 박종범 대표를 포함하여 2명(2019년에는 10명)이 종사하고 있다. 인원은 줄었지만 현재 농사펀드와 함께하는 농부 수와 소비자 수는 각각 600명, 2만 6000명으로 2017년 400명, 1만 6500명과 비교해 농부 200명, 소비자 9500명이 늘었다.
 
농사펀드와 관련 있는 농부들은 주로 중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가족농들이 중심이다. 친환경 농업을 하고 있거나 그 방향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는 농부들이다. 이들은 산지 수집상이나 공판장을 통한 판매보다는 소비자들과 직거래를 통해 좀 더 나은 가격을 보장받고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농부들이다.
 
농사펀드의 목표는 이러한 농부들이 영농자금을 확보하도록 돕는 것이다. 농사펀드를 통한 예약판매로 짧게는 수확 2~3개월 전, 길게는 7~8개월 전에 영농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산지 유통인과 1대1 계약이 아닌 다수의 소비자 대 농부로 N대1 계약을 하기 때문에 일방적인 계약 파기나 유통인의 잠적으로 인한 손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농부들의 이야기가 잘 정리된 온라인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자 관점에서 상품을 기획하고 개선안을 마련하도록 지원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농부들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을 파악하고 평가를 들을 수 있어 자신을 지지하는 소비자를 확보하게 된다.
 
박종범 대표는 농부들이 빚 걱정 없이 자신의 철학대로 농사짓기 위해서는 농부 1인당 200명 이상의 소비자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사펀드의 경험에 의하면 소비자 1인당 객단가(일정 기간 평균 매입액)는 3만 7000원이며, 1.7회 비중으로 재구매한다. 그중 20%는 연간 15만 원 정도를 소비한다.

농부 1인당 1500만 원에서 2000만 원 규모의 직거래 금액을 위해서는 200명 이상의 소비자가 필요하다. 농사펀드는 올해 100명의 농부들을 엄선해서 1인당 사전예약 구매액 1천만 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를 통해 농부들이 걱정 없이 농사짓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는 농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박종범 대표의 마음도 녹아 있다. 대기업이 점점 농업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이대로라면 생산자인 농부의 이름이 없어지고 이들이 대기업의 농업노동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와 소비자 "당신 덕분입니다"
 
▲ 농사펀드 뿌리밥상 포스터 2017년 농사펀드가 주최한 뿌리밥상 포스터
ⓒ 이창한

 
대기업의 농업 진출로 농·축산물의 수직계열화가 확대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의 스마트팜 정책을 기회 삼아 정보통신업계의 진출도 가시화되고 있다. 대기업의 농업 진출은 '농업 성장을 위한 자본 유치'라는 정부의 명분과 기업의 '농산업 세계시장진출'을 통한 수익창출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확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농부들이 자기 땅을 잃지 않고 생산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작은 규모의 생산자 공동체가 확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생산자, 소비자 모두의 인식전환과 역할이 필요하다.

정부는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농지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최근 불거진 공기업 직원들의 땅 투기 문제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도, 그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제 농지는 '농부의 것'이라는 관점(경자유전의 원칙, 농지농용의 원칙)에서 재정비해야 하는 사회적 한계점에 도달했다.
 
생산자는 농업이 지닌 다원적 가치를 인식하고 자기 일에 더욱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농사를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정부와 소비자가 그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비자는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위해서라도 내가 먹는 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농부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도록 가치 있는 소비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농사펀드와 (주)88후드가 공동으로 진행한 '농부와 일러스트' 굿즈 그림달력
ⓒ 이창한

 
농사펀드의 비전은 농부와 소비자가 먹을거리를 매개로 서로에게 "덕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농부는 소비자가 본인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계속 농사지을 수 있도록 조력해 주는 사람이니 "덕분입니다"라고 말해야 하고, 소비자는 농부가 존재함으로써 건강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먹고 살 수 있으니 "덕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농부와 소비자가 서로 "덕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공동생산자로서 건강한 관계가 성립된다.
 
좋은 농부들을 많이 만난 것이 농사펀드를 창업한 이유였던 박종범 대표는 풍요롭지 않아도 노력한 만큼 인정받는 행복을 농부로부터 배웠다. 사람들이 농촌에서 행복을 배울 기회를 제공할 다양한 농촌기획자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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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창한은 지역재단 기획이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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